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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부정공>선교랑공휘수행장(宣敎郎公諱晬行狀)
宣敎郎公諱晬行狀 公諱晬字輝遠宣敎郎玉川人我趙以高麗侍中諱璋始顯於譜傳至四世諱元吉有大勳勞於麗朝封玉川府院君享武曲祠諱瑜號虔谷麗朝副正入我 朝屢徵顯官不就享謙川祠諱智崙察訪兄弟四人友愛篤至長枕大衾晨夕同處世所稱相好亭也祖諱大春號三灘勵節校尉築亭漾碧江上與金河西白玉峰兩先生爲道義交亭下石面刻三賢船遊錄考諱懋以才行薦 除禮賓寺參奉妣文化柳氏認女甚有婦德公以萬曆甲申十月二十八日生甲午十一月十七日卒春秋七十一葬于祖考墓下艮坐原配宜人光山金氏令汁女墓合祔子時億通德郎贈承政院左承旨孫維章東山別庄栽蒔花竹與黃公雲溪信龜契誼尤深酬唱繽紛曾孫祺錫廷錫圭錫元錫朋錫壽階同知中樞府事推榮三世餘不盡錄噫公之主鬯孫光鉉氏謂余曰我九世祖考宣敎郎府君行錄如是疏漏而只以獲聽家庭所聞者言之則當家侄觀水公諱時聖之擧義也晝贊猷爲陳力就列行至勵山聞媾成痛哭還鄉也則堂堂大義載於國史可矣而至於家牒無此等一轉語家運沈滯可知豈非後孫之痛嘆者乎君其圖之以記吾志焉余惟顯而微微而顯理固然也惟我觀水府君以事親大孝特 蒙天褒以愛國大義擧義丙亂其勝蹟偉烈炳朗今古而公以季父之親同心同德指揮晝策可謂想像於百載之下矣然則今日後孫之齎恨固所然耳余雖不文豈無一言助之乎是以不敢以不文辭略草數行以竣後作者之採擇焉 歲丁未三月念日 傍孫 東勳 謹狀 선교랑공휘수행장(宣敎郎公諱晬行狀) 공의 휘는 수(晬)요, 자는 휘원(輝遠)이며 옥천 조씨인데 건곡 선생 휘 유(瑜)의 후손 삼탄공 휘 대춘(大春)의 손자로 고의 휘 무(懋)는 재행으로써 예빈시 참봉을 제수 받았고 비는 문화유씨 인(認)의 딸로 부덕이 있었다. 공이 만력(萬曆) 갑신년(一五八四) 十월 二十八일에 출생하여 갑오년 十一월 十七일 에 향년 七十一세로 별세하니 조고묘하 간좌원에 안장하고 배는 의인 광산김씨 영집(令汁)의 딸로 묘소는 합부하였다. 아들 시억(時億)은 통덕랑으로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의 증직을 받았고, 손자 유장(維章)은 동산 별장에 꽃을 뿌리고 대를 심어 운계황신구(雲溪黃信龜)와 더불어 교유하여 서로 술을 권하고 시를 읊었으며 증손은 기석(琪錫), 정석(廷錫), 규석(圭錫), 원석(元錫), 붕석(朋錫)인데 붕석이 수직(壽職)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어 三세를 추영(推榮)하였으며 그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의 종손 광현(光鉉)씨가 나에게 말하되, 『우리 九세조고 선교랑 부군 행록이 이와 같이 소루(疏漏)하고 다만 가정에서 전문한 바로써 말하면 종질 관수공(觀水公) 시성(時聖)이 거의(擧義)할 때 힘을 다하여 찬획하고 행진을 따라 여산에 당도하여 화 매(和盟)이 되었음을 듣고는 통곡 귀향하였은즉 당당한 대의는 국사에 실어 옳거늘 보첩에도 이런 말이 없는 것은 자손의 영락을 가히 알지니 어찌 후손의 통탄할 바가 아니리요 그대는 사적을 찾아 내 뜻을 기록해 달라.』고 하였다. 내가 생각하니 현양했다 미약하고 미약했다. 현양한 것은 순환의 이치라, 생각하건대 우리 관수 부군은 출천 대효로 특별한 천포(天褒)를 무릅쓰고 애국한 큰 의리로써 병자호란에 의거(義擧)하여 높은 행적과 거룩한 열행이 고금에 빛났는데 공은 계부(季 父)의 지친으로 심덕(心德)을 같이 하여 지휘 획책했을 것은 가히 백세 뒤에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즉 이제 후손의 한을 품은 것이 당연하니 내가 비록 문식이 우졸 하나 어찌 한말의 협조를 아끼겠는가. 대략 이와같이 글을 초하여 입언 군자의 채택을 바라노라. 방손(傍孫) 동훈(東勳)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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